
(어디까지나 원작을 읽지 않고 오로지 연극에서 보여진 내용만을 바탕으로 한 것이기에 무척 편협할 수 있다.)
알런이 어떤 환경에서 성장했는지를 볼 필요가 있다.
실질적인 주 양육자는 어머니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확고하고도 투철한 종교관으로 무장한 여인이다. 자신의 아들은 그녀보다 더 한층 강력한, (절대 남편처럼은 아닌), 신앙심으로 무장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녀는 매일밤 알런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오로지 금욕적이고 종교적인 신성함만을 강조한다. 알런의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내재된)욕망은 어머니의 반복된 교육속에 묻힌다. 아버지는? 많은 블로그들에게 아버지의 가부장적 존재를 언급했는데, 공연 내에서의 아버지는 '이름뿐인 가장, 허울 좋은 아버지' 수준인 것으로 보인다. 종교 문제로 아내와 갈등을 겪고 그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고작 3류 극장에서 시시한 포르노나 몰래 보고 있는' 정도로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내재된)욕망을 해소하면서 근근이 사는 사람.(심지어는 소년의 종교적 의식을 발견하고도 고작 헛기침 만으로 상황을 정리하려 든 사람.) 그래서 억압적이고 금욕적인 어머니와 '억압하고'사는 아버지 사이에서 알런은 성장한다. 그 닫힌 삶 한 가운데에 어느날 말이 뛰어드는 것이다.
여섯살의 그 기억은 알런에게 신천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더 높은 곳에서 위풍당당한 발걸음을 걷는 탄탄한 근육질의 말. 걸음을 걸을 때마다 근육이 떨리고 땀이 솟되 그 자태는 우아하기 짝이 없었으리라. 소년 알런은 말을 동경했을 것이다. 동경은 숭배가 되었을 것이다. (아, 소년이 말에서 '끌어내려진 뒤' 기수와 부모에게 하는 말도 상기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런 깡패같은 놈!"이라는 말을 아버지는 뒤통수에다 대고 했고 기수는 부모에게 대놓고 '당신들이 더 폭력적이다'라는 식의 말을 하지 않는가.)
소년에게 말은 종교가 되었다. 그는 말을 숭상한다. 초원을 달리는 말이 겪을 고행과 같은 것을 스스로에게 내리는 의식도 거행한다.('칭클창클'이라 불리는 재갈을 물고 채찍질을.) 그리고 질을, 마굿간을 만난다. 그러한 상황을 이용해 마침내 다시 말을 타고 달리며 억압된 욕망이 폭발하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한다. (실제 그 장면에서 흘러넘치는 에너지를 느꼈다.)
다이사트는 여기까지 보았다고 생각한다. 그 스스로도 여러 해 동안 욕망을 억압하고 환자들을 보며 고작 에술품의 흔적이나 어루만지는 것으로 위안 삼으며 살았다. 그리고는 욕망에 충실해진 알런의 과거를 보면서 번민하다('저 아이에게서 저것을 빼앗아 세상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정상인가?') 이내 (치료자로서의 의무가 아닌) '끝을 봐야한다.'는 생각을 강하게 갖게 되었으리라 본다.(약의 플라시보 효과로 알런이 숨겨놓은 문제적 상황을 드러내는 모습은......) 그리고.
알런의 마지막 행위를 보면서 떠오른 단어는 '파계'였다. '율법'을 어긴 승려와 같은. 신성한 장소에서 추악한 행위를 저지르려 했으니까. 그것을 '그들'이 목격했으니까. 그들 이외의 다른 '것'을 욕망하려 했고 (심지어는 실패했고!) 그들이 봤으니까. 돌이킬 수 없다.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경배하는 말들로부터 버림받을 것이다. 나는 소년의 행위에서 '자포자기'와 '두려움'과 다른 무언가가 뒤섞인 어떤 것을 느꼈다.
소년의 닫힌 과거의 문이 열렸다. 다음은 치료자 다이사트에게 달려있다. 이제 소년을 경배하는 그는 더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소년의 '육체의 상처'는 치료하겠지만 그 다음은 과연. ...
덧. 왜 소년은 '너제트'라는 이름의 말 만을 포옹했는가. 뒤 쪽에 앉은 탓인지 대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아마 이처럼 내가 여기서 놓친 다른 것들이 더 있으리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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